‘오디세이’가 영화로 나온다며 미국 영화 감독이 인구 대비 영화 관람자가 세계적으로 많은 한국에 홍보하러 왔고 TV 뉴스마저 요란하다. 그 고전의 여러 번역본 홍보 경쟁도 치열하다. 어느 번역본이든 무방하다. 완독한 후 모든 독자는 번역자를 넘어 아예 새 작가가 되어 새 오디세이를 쓰게 되어 있기 때문. 관념을 떠나 유형의 공간에 고착되는 순간 우리 의식 속 호머의 고전은 쪼그라들지 않을까? 수십 년간 서울-부산을 매주 오가는 오디세이로 자처하며,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는 한국 지리에 익숙해진 후 “Utis(Ithaca)”를 가끔 필명으로 써 왔다. Utis(그리스어 Οὖτις)는 우리 발음으로는 [우: 티스] 쯤이고 nobody란 뜻. 한국어에는 nobody의 번역어가 없다는 약점 때문에 그 단어를 직접 번역하지 못하고 애먼 동사나 형용사를 부정하는 편법을 쓴다. 숫자에 0(zero)이란 개념이 없는 상태와 비견할 수 있다. 영미인도 ‘부존재’를 가리키는 저 단어가 쉽지 않다. ‘공(空)에 감사하라’(Thank for nothingness)는 불교 고승의 가르침을 젊은 미국 불제자는 아무것에도 고마워하지 말라고 깨닫는다는 영어식 불교 유머가 그래서 나오고. 오
군미필 대통령이 방위 출신 국방부장관에게 육사 폐교를 시사하는 조치를 속히 취하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전국 TV에 방영되었다. 여야가 국방위 심의를 거쳐 정한 장성의 절반쯤이 육사 출신인게 무슨 대역죄라도 되나. 특정 지멱이나 운동권의 정치 독식은 괜찮나. 빈 총 든 군인이 최전방에 허수아비로 서 있는 것보다 오로지 육사 와해가 더 중요한 자는 국군통수권자 자격이 없다. 이재명은 부동산 투자로 수십억을 벌어도 세금을 거의 안 낸다며 징벌적 세금 폭탄의 세제를 예고했다. 또 최근 2배 레버리지 ETF 등 고위험상품 허용으로 증권시장을 투기판으로 몰고갔다는 비판도 면할 수없다. 그러나, 진정한 부동산 횡재의 장본인은 수십년 집 한 채 보유해 온 국민이 아니라 대장동 개발의 대장 및 그 졸개들 아닌가. 그는 혁명과 쿠데타도 분별하지 못하는 자다.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고 역사가 되며, 실패한 민란은 아무리 고아하게 추켜세운들 한 때의 악법으로 보호되는 임시 우상일 뿐. 제대로 법치주의가 작동했다면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었던 자는 대한민국 역사의 선대가 직면했던 필연적 조건과 상황을 희롱할 자격이 없다. 로마의 독재관 술라는 직권 남용 등으로 기소되는걸 벗어나고자 자
하이에크는 법이 특정 이익에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법의 지배가 ‘형식적(formal) 법치’일 것을 강조했다. 형식적이라는 의미는 껍데기라는 뜻이 아니라 특정 개인, 정파, 계층 등에 실질적으로 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제임스 뷰캐넌도 같은 맥락에서 규칙은 ‘일반성(generality)’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위 규범일수록 이 요구는 더 필요하다. 그것들은 법(입법 legislation과 구분되는 law)의 평등성이 요구하는 당연한 귀결이다. 비유하자면, 여섯 면이 고른 주사위와 같은 일반성을보장 못한다면 바른 제도로서의 의미가 없다. 경찰이 형소법 체계의 주인이 되게 하려는 황당한 짓을 이재명이 작당하는 이유는 보수층이 모두 눈치챘다고 여겼다가, 과연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현재 이재명 사건은 기소중지 상태다. 형소법 개악안은 겉으로는 검찰권 남용 방지라는 핑계를 들지만, 그것은 먼 이유일 뿐이고 이재명 재판과 직결된다. 이 경우 검찰 수사에 절차적 위법이 있었다는 이유로도 공소를 기각할 수 있고, 이재명을 탄압하기 위한 검찰의 기소권 남용으로 판단하여 공소를 기각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여권
책을 들고 중도생태공원, 의암호 수변, 김유정문학촌을 찾은 이들이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독서대전을 앞두고 마련된 참여형 몰입 독서 프로그램 '리딩웨이브 인 춘천'의 모습이다. 춘천시는 풍부한 수변 공간과 시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책 읽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춘천은 소설가 김유정과 한국 잡지 선구자 차상찬 등 지역 출신 문필가들의 영향으로 독서 문화의 토양을 가졌다. 이러한 기반 위에 춘천시는 올해 3월 '책의 도시'를 공식 선포했다. 41개의 도서관이 있으며, 이에 따른 도서관 생활권은 도시 내 어디서나 15분 이내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춘천시는 대한민국 독서대전 개최 도시로 선정되면서 국비 3억 원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연중 독서 문화 확산을 도모하고 있다. 올해 9월 독서대전 주제는 '책의 물결, 춘천 산책'으로 정해졌다. 김유정문학촌은 문학마을로, 공지천 일대는 책 읽는 문학 정원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출판 및 서점 부스, 전시, 강연,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전국 독자들을 맞이한다. 도서관 접근성도 확장되고 있다. 시립 청소년도서관은 부모와 아이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추억
이재명 정부 산업정책의 압권은 소위 반도체 클러스터로 각인될 것이다. 언뜻 보면 몇몇 분야를 수도권 및 영남에도 배분하는 구색을 띠지만 이미 세계 정상급 완성 업종으로 당장 큰 수익을 내고 있는 반도체 분야를 자신의 정치 기반인 지역으로 기업체를 끌고 간다. 과거 다른 정부에서 이런 식의 지역 배분을 했더라면 정경 유착이라고 반발했을 짓이다. 결국 이런 식인가? “고개(嶺) 남쪽으로 가면 정경 유착, 호수(湖) 남녘으로 가면 지역 균형 발전”. 기업의 입지 선택을 왜 정권이 정하나. 자주 내세우던 정의와 민주도 결국 돈 끌고 가는 도구였나? 문재인은 이재용을 감옥에 집어넣어 가며 길들이기를 실시하더니, 이제 이재명은 그 기반 위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감옥만큼이나 위협적인 공개적인 큰 절로 이재용을 그들의 정치 기반이 호남에 거액을 뿌리도록 끌고 갔다. 최적 입지의 선택은 기업 자신이 정해야 하며 대통령의 쇼맨십 같은 공개 큰절로 강요해 가는 건 경제 자유의 침해다. 이런 아이디어 준 소위 경제 참모들의 머리는 저 고향 일방으로만 작동하는 반도체(半導體) 두뇌. 영남 호남도, 수도와 지방도 말고, 기업이 스스로 정하게 하라. 한국의 반도체가 무에서 출발해 세계
노르웨이는 좋은 축구팀이었고 세계 최강의 팀 일원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플레이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이었다. 노르웨이팀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탁월한 축구팀이라는 국면이며, 존경의 대상도 거기까지다. 플레이 자체를 떠난 그 팀의 다른 이야기들은 큰 우려도 준다. 스포츠를 정치화하는 순간 그것은 답이 없는 논쟁으로 끌고 간다. 월드컵이 끝난 후 노르웨이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이스라엘을 국제 스포츠 연맹에서 축출하려는 추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을 증오하는 무리들은 이런 노르웨이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노르웨이 축구팀이 정치적으로 선-악을 구분하는 국제 정치에서 특정 노선의 선전 역할까지 자임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한 정치 이념에 편향된 모습을 불편하게 노출하게 된다. 그들은 애써 ‘인도주의적’이라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한 지역을 지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연출하지만, 교전 당사국 중 어느 일방에만 도움을 주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진정한 인도주의라고 평가받기 어렵다. 노르웨이가 비난해 온 이스라엘은 노르웨이가 기울어져 있는 팔레스타인만큼이나 자신의 방어 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팀이 올림
군미필자가 군 최고통수권자, 방위 출신으로 탈영 의혹을 받는 자가 국방장관. 사관학교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질만하다. 나라 간성 양성하는 사관학교마저 지방으로 이전해주고 표 얻는 공기업 하나쯤으로 농단하기 전에 자신의 의혹부터 밝혀라. 국방부 장관이 자신의 탈영 의혹에 대해 병역 자료로 해명하지 않고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며 은폐한다면 갈 데까지 간 것. 우리가 뭘 "오해"할지 알려달라. 비례원칙 떠들던 정권이 그게 무슨 대단한 국가안보 자료라고 숨기나. 저런 장관을 어느 군인이 따르겠나. 모든 군인이 탈영하여 국방 장관을 거부하기 전에 즉각 해명 혹은 물러나라.
좌파 수괴가 우파 진영에서 배신자를 뽑아가는 이유는 그에게서 번영의 전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불려 가는 자도 이쯤은 대개 알고 갔다. 그 귀결도 빤하다. 정권 초기 기대와 인기를 누리지만, 토질이 다른 그 밭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그의 철학이 먹혀드는 걸 정권은 용인하지 않는다. 너를 부른 건 너의 우파 집안 무너짐을 즐기려 한 것이지 네가 내 집에 이런저런 간섭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곧 규제인 자 밑에서 무슨 규제 해제. 그리로 간 자는 정권 인기가 줄어드는 시기쯤 적당한 출구 전략을 찾아 다시 뛰쳐나오게 되어 있다. 좌파를 떠나며 던지는 한두 마디는 대개 멋진 우파 철학과 부합한다. 그것에 감격할 이유는 전혀 없다. 배재고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는 바른말 한 마디 했다고 한동훈을 다시 수용할 수 없듯이. “탈이념, 실용주의, 정치가 아니라 정책”...이 중요하다는 변절자들의 상투 변명이 타당할까? 관제 신문에 나타난 ‘그분’의 어록을 한번 보라. 거기에는 국민의 생산, 번영, 안전, 소득 증대, 국방, 예산의 효율적 집행, 산업이 잘 작동되게 쓸데없는 제약을 당이 적극 해소해 주고, 부패를 척결
우파 일부 사람들 참 답답하다. 배재고 학생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되 다만 그 처벌이 너무 과하다는 식의 변증. 필패요, 자멸의 언어 게임 판을 벌이고 있다. '스벅 가자' 라는 언어를 애초에 부당하고도 자의적으로 처벌 사유 조항으로 만든 것, 그리곤 선무당 칼 휘두르듯 '너 스벅 가자고 말했지? 따라서 벌을 받아라' 라며 범죄로 몰고가는 게 근본 오류라는 걸 포착하지 못한다. Sbug은 닌텐도 게임 속 곤충같은 생명체 이름이며 한 때 금융시장에 나타난 은(Silver) 선물 가격의 수익률을 추종하는 상장지수증권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게 스타벅스 커피점의 뜻일지언정 그 발음이 왜 죄가 되나. 복잡한 절차 따르느니 대충 사과하고 끝내어 야구부 학생들의 진로 막히지 않게 하자는 학교 당국의 미봉책은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여기서 밀리면 우리에게 '스'+'벅'은 영원히 금기어가 된다. Oil 팔아 먹고사는 나라, 스벅스벅 눈을 밟는 걸음...라는 문장 또한.
90년대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로 가 승려 생활을 하던 롭가 랑젠(Lobga Rangzen)은 미국으로 건너가 택시 운전 등을 하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해 왔다. 중국이 2026년 7월 1일부터 강행하는 소위 ‘민족단결촉진법’은 중국어 사용을 우선시하고 소수민족의 분리주의 활동을 처벌하는 족쇄다. 랑젠은 7.2일 뉴욕 유엔 건물 앞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했다.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며 분신한 승려는 첫 사례인 2009년 이후 약 170명에 이른다. 중국은 자국 제조업체의 싼 생산 단가에 맛 들게 하고 중국 관광객 군중을 보내어 주변국 시장에 잠시 활력을 주지만 그 후에는 이 생산자 및 소비자 무리를 주변국 통제의 지렛대로 쓴다. 거기에 더해 공자 학원을 통해 공자 아닌 중국 공산당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여기에 주변국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소프트 침공인 동북 공정, 서북 공정, 서남 공정 등을 조작하는 ‘변강사공정(邊疆史工程)’(*주변 지역의 역사를 새로 쓴다는 뜻)을 기획했다. 이게 끝났다고 여기면 큰 오산이다. 지금은 이를 견고히 굳히는 단계다. 오늘날 중국은 원, 명, 청 시절부터 이미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였다고 우기지만, 근거가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