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수괴가 우파 진영에서 배신자를 뽑아가는 이유는 그에게서 번영의 전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불려 가는 자도 이쯤은 대개 알고 갔다. 그 귀결도 빤하다. 정권 초기 기대와 인기를 누리지만, 토질이 다른 그 밭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다. 그의 철학이 먹혀드는 걸 정권은 용인하지 않는다. 너를 부른 건 너의 우파 집안 무너짐을 즐기려 한 것이지 네가 내 집에 이런저런 간섭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곧 규제인 자 밑에서 무슨 규제 해제.
그리로 간 자는 정권 인기가 줄어드는 시기쯤 적당한 출구 전략을 찾아 다시 뛰쳐나오게 되어 있다. 좌파를 떠나며 던지는 한두 마디는 대개 멋진 우파 철학과 부합한다. 그것에 감격할 이유는 전혀 없다. 배재고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는 바른말 한 마디 했다고 한동훈을 다시 수용할 수 없듯이.
“탈이념, 실용주의, 정치가 아니라 정책”...이 중요하다는 변절자들의 상투 변명이 타당할까? 관제 신문에 나타난 ‘그분’의 어록을 한번 보라. 거기에는 국민의 생산, 번영, 안전, 소득 증대, 국방, 예산의 효율적 집행, 산업이 잘 작동되게 쓸데없는 제약을 당이 적극 해소해 주고, 부패를 척결하고... 요컨대 기술적 합리성, 경영학적 능률성, 합법성, 청렴성으로 가득하다. 이 기능과 지식을 가진 자유 진영 학자가 감투를 얻어 그 진영의 기술관료로 불려 간다.
그런데 ‘그분’은 핵으로 한국을 위협하는 조선노동당 총서기 김정은이다. 합리성, 기술성, 능률성, 합법성 자체는 누구와도 짝을 짓는 눈먼 기능이다. 그것들이 어떤 이념 가치, 어느 진영을 위해 헌신하는가? 가 가장 중요하다. 해적 무리에 가담한 이상, 그 수괴에 맹목적으로 따랐든 언쟁을 좀 벌이며 따랐든 하등 차이가 없다. 가출했던 자를 다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지 말라.










